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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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관세음보살 좌상의 문화재적 특징

조선시대 최고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간직

마애관음보살좌상은 학도암 뒤쪽으로 커다란 바위 면에 13.4미터에 이르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은 열점을 넘지 않는다. 핍박 받았던 조선 불교의 어려웠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된 관세음보살 좌상은 마애불이지만 회화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빼어난 수작이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겨진 이 관음보살상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화불이 있는 보관 장식이나 칠보문, 옷 주름 표현 등에서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보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양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관음보살상의 얼굴은 가늘고 긴 눈과 뭉툭한 코, 작은 입술 등으로 인해 새침한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 표현된 형식적인 삼도는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 있다. 양쪽 어깨에는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안쪽의 내의(內衣)는 가슴 위에 수평으로 입고 그 위에 띠 매듭을 표현하였다. 두 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얹어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서 들고 있다.

이 보살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가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사각형의 홈인데 복장 감실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복장이란 불상을 조성할 때 불상 내부에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부조상인 마애불에 그러한 예가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마애불의 가슴부분에 구멍이 있는 예는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

마애불 왼쪽 벽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을 비롯하여 축문을 염불한 통주, 마애불을 조각한 금어의 이름이 보이는데 마애불의 조각가를 불화가인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50여 글자가 되는 명문에 의하면, 1870년에 명성황후가 불심으로 발원하여 조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1878년에 학도암을 중창하면서 한씨 일가의 시주로 장선화상 등이 마애불상을 보수했다고 되어 있다. 이 마애관음보살상은 조선 말기의 불상이지만 왕실에서 후원하여 조성된 만큼 조선 말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불교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으며 조성 명문이 남아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