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명성황후의 사랑이야기

조선 고종3년(1866년)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은 16세에 왕비로 간택을 받아 가례(결혼)를 올렸으나, 고종(15세)은 이미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황후가 되었으나 첫날밤에 다른 여인에게 간 것이다. 더군다나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더욱 총애했으며 명성황후와 대소신료들을 앞에두고 완화군을 안고 왕실이 튼튼해졌다며 크게 기뻐 하였다. 임금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던 나이 18세에 불과한 어린 황후에게 한 궁녀가 부처님을 조성하면 그 가피로 원하는 바를 얻을수 있다며 권선하였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사랑을 얻고 왕자를 낳아 왕통 잇기를 발원하며 가장 기운이 좋은 명당터인 불암산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불사를 연다. 당시 최고의 불모였던 장엽을 금어로 임명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던 왕실 석공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에게 명해 관세음보살을 조성하게 한다. 조성을 시작하자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인해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사랑을 얻게 되었고 조성 완료(1870년)후 몇년 되지 않아 후에 순종이 되는 왕자 이척을 낳게 되는데 이후부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은 첫째 사랑을 얻고, 둘째 자녀를 얻으며, 셋째 자녀가 성공하는 세가지 가피를 주는 것으로 유명해 지게 된다. 후일 고종은 명성황후 시해 후 1년 뒤 덕수궁에서 홍릉까지 전화를 연결해 매일 아침 명성황후의 무덤에 답변없는 안부 전화를 걸었다. ‘양인들이 만든 이 전어기(전화기의 옛말)라는 것은 멀리있는 사람의 소식도 전해준다 하더니 하늘까지는 닿지 않는가 보오.’라며 슬퍼하였다. 사랑 얻길 기원하며 학도암 관세음보살좌상을 조성하였는데 그 사랑은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졌다.